갑순이와 정돌이 이야기

갑순이와 정돌이 이야기 #4 - 직장(2024-04-11/+1813/+59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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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순이와 정돌이 이야기 #4 - 직장(2024-04-11/+1813/+594)

정돌맹이 2024. 4. 12. 14:44

선거를 했고 잘해주기를 바랄뿐이라서  선거이후에는 크게 이렇다할 이슈가 없었다. 선거일에는 나가서 먼가 하려고 했으나, 기생수 6편과 나는솔로를 보고나니 그냥 그렇게 하루가 갔다. 머리속으로는 골프도 치고, 책도 읽고, 드론도 날리고, 글씨연습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나가서 산책도 하고, 와이프 점심도 미리 싸줘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부서이동을 하고 나서 가급적이면 나 스스로 먼가를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늦게일어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 날이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아도 소중했다. 

그래서 오늘은 짧게나마 30대 초반까지의 내 회사생활과 지금의 회사생활이 다른지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간단하게 나의 회사생활을 이야기하면, 나는 26살에 미국에서 1년간 인턴을 했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1년 반 정도의 중소기업 컨설팅 업체에서 일했다. 원래라면 호주로 이민가기 위한 배를 고치는 업체에 일을하기 위해서 였지만, 주변의 권유로 짧은 계약직 이후 석사를 했으며, 한번의 이직 이후에 지금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석사전까지의 회사생활은 나름 근면성실했던것 같다. 9시 출근에 8시까지는 회사를 꼭 갔으며, 6시에 칼퇴는 거의 해본적이 없다.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전문가는 되고 싶었다. 집이 '화성'이고 회사가 '가산디지털단지역'에 있었으나,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로 을지로 3가에 있는 번역학원을 다니고 집에 새벽한시에 들어갈정도로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상사가 준일은 가급적이면 당일까지 해서 드렸고, 늦게가고 날을새는건 일상다반사였다. 

그랬던 직장을 그만둔건 담배와 술을 엄청 하던 이사들 때문이었다. 나는 대표님과 직접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사님들과 직접적으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쉴새없이 나갔다 들어오시면서 풍기는 담배냄새, 점심시간에 술마시고 자는 모습 등을 사무실 배치상 너무 봐야했다. 그리고 담배와 술을 마시면서 하시는 푸념이 20년뒤에 내가 가져야할 고민이라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이민을 결심했고 퇴사했다. 

퇴사 후 호주를 가는 날을 기다리는 시점에서, 어느날 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알게된 다른 기관의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너가 하던 분야가 비전이 없는것도 아닌데 너무 아쉽다." 라는 말을 해주셨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동일분야에서 최상위 기관에 단기 계약직으로 일할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화성-음성간 셔틀 출퇴근이었기 때문에 더 쉽지 않았지만, 더 열심히 일했고 4개월이 되었을 무렵 팀원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내 미래에 대해 조언해주기 시작했다.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주보다는 석사를 추천하거나 아는 교수님에게 직접 연락해주셨고, 나는 몇몇 학교에 지원하였다. 운 좋게도 서울대를 포함한 메이저 대학에 전부 붙었으며, 서울대 석사생활을 시작했다. 

서울대 석사의 생활은 기숙사조교 활동이 절반, 비트코인이 절반이었다. 그리고 석사생활 및 동조교 활동을 통해 만난 수많은 석박사 학생들을 통해 내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석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할 수있는 연구원에 일하게 되었다. 업무는 어렵지 않았다, 일이 많은것도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가진 영어수준은 내 업무에 필요해서 라고 생각했으나, 영어를 못하는 사람의 이메일, 번역 등 잡무를 맡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남자 상사와 중간에 있는 여자 대리들이 하는 묘하게 불편한 대화가 싫었고, 그때그때 뭉쳐있는 그룹별로 다른 불평불만이 불편했다. 연구원에서 인정받지 못한건 아니었지만, 인정받기 싫은 그룹이었다. 그래서 더 늙기전에 옮기고 싶어서 그만두고 싶었고, 그쯤 계약직으로 일할때의 상사가 연락이 오셨다. 

난 그분의 추천에 따라 다시 한번 이직을 했고 지금 직장에 왔다. 보다 연구다운 연구, 규모있는 연구,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지금의 연구원은 너무 좋았다. 위에 직급일수록 바쁘고, 책임감과 자신의 분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차있다. 그렇게 4년이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내가 윗분들 나이가 되었을때 저렇게 바쁜것이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난 일년간 내 뇌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수도 없이 많은 상사들에게 같은 질문을 물어봤고, 석사때 알고 지내던 직장인 선배들에게도 물어봤다. 지금은 떠난 -허리디스크로 아침에 못일어나시고, 스트레스로 힘들어하시지만 꿋꿋하게 일하시던- 부서장님에게도 물어봤다. 본인이 좋아하시는 분야에서 일해서 행복하다 하시지만 행복속에 나만 있었다. 같이 살아가는 가족들도 행복했었는지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의 직업에 대한 열정이 자식들의 성적과 상관이 없었고, 부부싸움에 연관성이 없었고, 화목함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끊임없이 물어봤다. (그냥 누군가 내가 열심히 일하면 나머지는 따라온다고 말해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가봐도 열심히 일하지 않지만, 스스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되면 동일한 질문을 여쭤봤다. 대답은 비슷했다. 두 그룹 모두 스스로의 만족도는 높았고, 가족과의 행복은 관련성이 적었다. 

그래서 이런 질문에 답이 없음을 30대 중반쯤 깨닫고 있을 무렵, 나는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있는지에 대해 미친듯이 질문하기 시작했고 6개월쯤 지났을때 아래의 3가지 대답을 스스로 할 수 있었다. 아니, 3가지 대답이 공통적으로 나오거나 저 이상의 대답이 나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1. 나는 취미를 바꾸는게 취미이고, 한분야에 집중해서 파고들기 보다는 '어느정도 할줄 알아' 라고 말할 수준에서 멈추고 새로운걸 하면서 여러분야가 융합되어 창의성으로 발현되는 것을 즐기는 스타일이다.
2. 지금 연구하는 분야에 다른 팀원들에 비해 회의적이며, 비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머를 위해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이 세가지 대답으로 고민할때쯤 별로 신경도 안쓰던 계약직과 갈등을 빚었고, 팀이 커지는 과정에서 새로온 윗분들과 스타일이 다름을 느꼈다. 참았다. 내가 건들지 않아도 끊임없이 나를 자극했고, 나는 자율근무를 통해 최대한 겹치는 시간대에 일하지 않았다. 1년에 155회를 출장을 나갔다. 날을새서 일하더라도, 근무시간에 얼굴을 보기싫어서 옥상에 올라가서 커피만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라고 믿으며 참던 때에, 회사에 공고가 났다. '동일 직무/분야 또는 부서 장기근속에 따른 업무만족도 저하 방지, 다양한 직무경험과 경력개발의 기회 부여를 위한 부서 전환'

3번의 전화와 1번의 상담이었다. 거의 알지 못하는 행정부서의 업무를 물어볼 수 있는 2통의 전화, 신청시 진행절차를 묻기위한 1통의 전화. 그리고 이런 고민에 대해 1번의 상담. 부서이동의 진행속도는 담당자와의 통화에서 들은것보다 훨씬 빠른 10일이 걸렸다.(최근 우울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신분이 있어서였을까?)  윗분들의 요청대로 연구원에서 공지가 날때까지 함구했으며, 1월 31일 오후 4시에 발표가났고, 2시간만에 내 짐을 차에 때려박듯이 싣고 사무실에 남아있는 몇몇 분들에게 인사 후 본원으로 출발했다. 누군가는 잘못을 해서 쫒겨났다는 오해를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음을 탓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나는 고통을 키워서 한번에 상사에게 요구하는것이 차라리 좋았다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해결하려하면, 어설프게 불편한 상태에서 근무만 길어지지 않았을까?

이게 지금의 부서오기 직전까지의 내 모습이었고, 지금은 만족한다. 행정은 자유가 상대적으로 적고, 상사도 있지만 시키는 일만 하고있다. 내 의견을 추가하거나 나서지 않는다. 어떤 업무적 발전을 위해 스스로 압박하지 않는다. 9시-6시 근무를 철저하게 지키고 퇴근후의 내삶을 즐긴다.(그래서 이 블로그를 쓴다.) 내 결정으로 나랑 비슷하게 입사한 친구들 보다 직급상 뒤로 갈수도 있겠지만, 직급을 뺀 나머지는 내가 좋기를 바라면서, 아니 나 스스로 더 만족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말못하고 부서이동을 하게 되면서 갑자기 당황했고, 세부 사정을 처음 듣고 속상했을 와이프에게는 너무 미안했고, 지금도 미안하다. 아이를 갖기 전에 할수 있는 마지막 내 삶의 조정이었고 언젠가 비슷한 일이 있다면 난 또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때만큼은 처음부터 와이프를 내옆에 두고, 아이가 있으면 아이도 두고, 결정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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